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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니스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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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위에 명시, 이하 제 허접한 글빨로 작성합니다 ㅠㅠ)
"당신은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십니까?"
"산이 거기 있기에(Because it is there)"
위 명언을 남긴 사람이 누군지에 대하여
상당수의 사람이 에베레스트를 초등했다고 인정받는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한 말로 알고 있고,
심지어는 우리나라의 엄홍길 대장이 한 말로 알고 있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실제로 위 말을 남긴 사람은 영국의 등반가 조지 말로리입니다.
말로리는 1923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행사에서 위와 같이 답변했고 다음날 뉴욕 타임즈에 대서특필됩니다.
(당대로서는 상당히 도전적인 발언이었다고 합니다.)
이듬해 말로리는 1924년 영국 등반대의 에베레스트 원정에 합류하였는데
그것이 말로리에게 세번째이자 마지막 에베레스트 등반이 됩니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티베트를 경유하여 에베레스트 북동쪽 능선을 이용하는 코스를 주로 활용했고,
사진에서 보시는 좌측의 능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1924년 6월 8일 말로리와 그의 동료 어빈은 에베레스트 북동릉 8,150m의 캠프 6에서 출발하여 등정에 도전합니다.
(엄밀히 말해 말로리는 당대에 명성이 자자한 등반가였고, 어빈은 옥스퍼드 재학생으로 신출내기 조수에 가까운 입장이었습니다)
말로리와 어빈에게 보급품 지원을 담당한 오델은 같은 날 오후 12:50경 1km 정도 되는 거리에서
말로리와 어빈이 8,650m 고지의 세컨드 스텝(2nd step)이란 바위절벽 구간을 통과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처럼 오델에게 10분 간 목격된 후 기상 악화로 가시거리가 짧아지고 그 이후 말로리와 어빈을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5년이 경과한 1999년 노스페이스의 탐사대가 정상 쪽을 향해 양팔을 뻗은 채로 얼어붙은 말로리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그 패딩 회사 맞습니다)
이후 말로리와 어빈이 등정 후 하산 도중 변을 당했는지
아니면 등정을 하지 못한 채 사고를 당했는지는 등산계의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습니다.
그 당시에는 고어텍스 소재의 자켓이나 구스다운 패딩도 없었고,
(등반 당시 말로리는 영국 버버리 사의 코트를 개량하여 입고 있었습니다.)
말로리 일행은 고정자일이나 철제 피톤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산소통은 등반용이 아닌 공군 비행기용이어서 무게도 15kg에 달하고 고장도 빈번했습니다.
(말로리가 당시 컨디션이 안 좋았던 어빈을 굳이 선택한 이유는 어빈이 산소통 수리에 능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세컨드 스텝의 난이도가 그 당시 자유등반 기술로 등반이 가능했는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등정 여부를 떠나서 극지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순수하게 목표를 향하여 최선을 다한 말로리의 정신은 후대에도 높게 평가될 것입니다.
추신:
당시 말로리 일행은 코닥의 포켓 카메라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코닥사에서는 필름만 발견되면 현재라도 인화할 수 있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다만 아직까지 말로리의 유품으로 카메라나 필름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코닥이 파산 신청하였는데 먼 미래 필름이 발견되면 과연 인화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추신2:
조지 말로리에 대한 헐리우드 영화가 촬영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톰 하디가 말로리 역으로 내정되었다는 루머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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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처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목숨과 맞바꾼 명언을 남긴셈이네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이야기는
영원히 아름다운 전설로 남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말로리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을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참고로 힐러리가 에베레스트에 초등한 것은 1953년의 일로서
말로리는 그보다 무려 29년 전에 등정을 시도한 것입니다.
제대로 된 장비나 클라이밍 기술이 없던 그 시절에
등정을 시도한 것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스터 님께서도 좋은 오후 되세요 ^^
저는 지금 삶에서 조금만 어렵고 힘들어도 쉽게 무너지는데
저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이겨내려고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존경스럽네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서 좋았고, 재밌게 읽었습니다.
예 이상과 행동이 하나로 된 실로 고귀한 등반이었습니다.
스스로도 1924년 등반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고 여기고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말로리는 자신이 등정에 성공을 하면 부인의 사진을 정상에 묻고 오리라고 언급한 바 있었고,
1999년 발견된 그의 시신에서 지갑이 발굴되었으나 부인의 사진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그의 등정 성공을 주장하는 견해에서 유력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말로리가 등정에 성공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극한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를 존경합니다.
비록 부족한 글솜씨이지만 RonnieJ 님께 조금이나마 영감을 드리게 되었다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