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 gimmepoint
- 조회 수 162
맘잡고 핸드폰도 끄고 공부하려 했는데 TV 만 보게 됬네요...
정말 TV 는 바보상자가 맞나봐요...
그래서 오늘은 역사를 공부했으니 한번 읊어 보겠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원폭 2대 맞아서 무조건 항복을 함
그로인해 조선은 독립을 함
북쪽에서 지켜보던 소련은 남은 일본군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북쪽에서 밀고 내려옴
그걸 알게된 미국이 남쪽에서 밀고 올라옴
둘은 38도에서 선을 긋고 아래는 미국, 위는 소련이 통치하며 침범하지 않기로 함
소련은 김일성을 앞세워 건접적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미국은 맥아더가 직접 해먹었음
그래서 북쪽은 김일성의 주도로 친일파가 잘 처리 되었으나
남쪽은 미군의 인력부족으로 주요 관직에 있던 친일파가 그대로 자리를 그래서 한국 문제를 차지하게 됨
그러는동안 미국과 소련이 영국과 함께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를 열었고
1 . 임시 민주정부 수립
2 .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3 . 미 영 소 중 의 신탁통치 (최대 5년)
이라는 결과가 도출됨
그러나 동아일보는 이중 딱 신탁통치 부분만 내보내는 희대의 병크를 냄 (개인적으로 이게 분단의 제일 큰 원인일 듯)
그래서 처음에는 모두가 극도로 반발했으나 좌파가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고 지지하게 되고 우파는 그것을 시탁통치 창성으로 받아들임
(여기서 좌우의 대립이 극심해짐)
(참고로 여기서 좌파는 자본주의자, 우파는 사회주의자)
이후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2번째에 결렬됨
이후 한국 문제를 UN에 상정함
그 당시 미국이 UN에 돈을 많이 내고 있었으므로 인구수에 비례하여 총선거를 하게 됨
(당시 남쪽에 인구수가 많아 그대로 진행하면 한반도는 자본주의가 될 삘이였음)
소련과 북한은 거부함
그래서 UN 은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만들라고 함
이때 백범 김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음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삼팔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 성생님의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중
이라는 말을 하셧고 그 외에도 통일을 위한 많은 일들을 하셨음
그러나 총선은 진행되어 5월 10일 예정되었던 총선은 끝남 (그래도 북한꺼 100석은 남겨놓음)
그리고 북한은 1948년 9월 9일에 자치정부를 구성했다고 함
그리고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어 김구 선생이 유력하였으나 죽음 (이승만이 그랬다는 심증은 있지만 심증만 있음 그래서 안잡힘)
그래서 자유당의 이승만이 당선됨 (이승만은 친미파로 둔갑한 친일파의 표로 대통령이 되었음)
이승만은 반민족행위처벌법 (줄여서 반민법) 을 제정하고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줄여서 반민특위) 를 설치하였으나
제대로 작동이 안됨 (대통령의 압박으로 인해)
그래서 이 당시에 안잡힌 친일파들의 후손이 아직도 우리나라 위쪽에 있음
그리고 이때가 냉전시대의 시작쯤임
(자본주의의 미국과 사회주의의 소련이 대립하는, 차가운 전쟁)
그때 한반도 주변이 한반도 남쪽을 제외하면 다들 사회주의라서 긴장이 있었음
그때 북한이 소련과 비밀 군사 협정을 채결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여 남북전쟁을 준비함
그 다음에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은 한반도와 타이완에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경우 미국은 개입하지 않겟다고 선언함
그리고 1950년 6월 24일, 북한은 평화적인 제스쳐를 보내왔고 남한은 그로인해 비상계엄령을 풀고 군인의 약 33%를 휴가보낸다
그리고 그 다음날 북한이 전쟁을 걸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내려온다
그리고 이때 이 유명한 짤이 탄생한다...
이때 이승만은 안심하고 하던거 하라고 했지만 3일만에 서울이 밀리고 곧바로 낙동강 라인까지 밀렸으나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백두산 부근까지 밀고 갔다.
그리고 중공군이 참전하여 38선 바로 아래인 37도선 부근까지 밀려났고 여기서 약 2년동안 대치하다가 휴전협정이 채결되었다
이 전쟁은 냉전시대 사상 최대의 전쟁이었고 많은 산업시설 파괴와 수백만명의 사망자와 전쟁고아,이산가족의 발생이 있었다
이로 인해 남북간에 대결의식이 늘어났고 적대 감정이 높아져 분단이 굳어졌다
그리고 전쟁이 진행될 동안 이승만의 발췌개헌이 이뤄졌다.
원래 4년 연임제였던 대통령 임기를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4년 무제한 연임으로 만들었고 장기독재의 발판이 되었다
이 개헌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이승만에 대해 신뢰를 잃어버렷고 지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3/15 대선이 찾아왔다.
3/15 대선에서는 3,9인 단체투표, 투표하기도 전에 투표함에 이승만 찍은 용지 넣기 등 많은 부정이 있었고,
그에 대해서 사람들이 항의했고 이승만 정부는 그들에게 최루탄을 발사했다.
그러다가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있고 발에 돌덩이가 묶여있는채로 마산 부두 앞 에서 발견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노했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다가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을 했고 명망있는 사람들이 시국선언을 했다는것이 막타역할을 했고
이승만은 하야했고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일단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추천인 1
작성자
댓글 3
수정했습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발췌개헌은 1952년에 있었고
휴전 후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연임 제한을 철폐했습니다.
야인시대에 나오는 사사오입 개헌 영상입니다.
딴지를 자꾸 걸어서 죄송하지만...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ㅠㅠ
그리고 중공군이 참전하여 1.4 후퇴를 하여 서울을 다시 포기하고 북위 '37도'선 부근까지 밀려났습니다.